소설/틈2011. 2. 6. 19:49

12. EPR paradox
 갑작스런 휴가가 생겼다. 교수님께서 잠깐 해외로 학회를 가시는 것도 그러했지만.. 갑작스런 연휴도 생기기도 했고 해서 쉴만한 시간이 생겼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이런 따사로운 봄에는 나들이를 하지 않으면 왠지 날씨에게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못본 친구들을 만날까? 아니면 오랜만에 학과 친구들과 술이라도 한잔 마실까 하다가 그것도 아닌거 같아서 생각을 멈췄다. 일단은 햇빛이나 쬐면서 생각을 해봐야겠어서 건물 밖으로 나와 나무 밑에 들어가 나무에 기대 서있었다. 건너편 잔디밭에 학과 후배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모여 낮술을 마시고 있다. 다른 학과 사람들이 보기엔 좀 야만스러운 풍경일수도 있지만 학과내에선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요즘은 그나마 그런 사람들도 별로 없기 때문인지 더 재밋어 보였다. 그래도 내가 학과에선 좀 고학번인지라 쉽게 자리에 끼지 못했지만 그냥 보는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밋었다. 확실히 내일부터 연휴란것과 거기서 풍겨오는 여유로움이 기분 좋았다. 갑자기 따뜻한 바람이 불었고 기분이 좋아서 후배들에게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주었다. 그래봐야 탕수육 정도이지만 그래도 후배들은 좋아했다. 잠시 자리를 차지하고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재밋게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터덜터덜 학과방향으로 걸어들어왔다. 
조금씩 땅만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수진이가 보였다. 수진이게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수진이는 나에게 몇마디 말을 걸려고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시선이 내려가 버린다. 조용히 더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안했다. 그렇게 밖에 못하는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더이상 다가가지도 잡지도 않는 나에게..
학과 복도에서 승현이를 만났다. 
"연휴동안 뭐할거야?" 라는 승현이의 물음에
"여행이나 가볼려구." 라고 대답했다.
"혼자? "
"응."
"그래, 머리좀 식히고 와. "
승현이는 마치 나에게 있던 일을 알고 있는듯 가볍게 이야기 했다. 확실히 승현이가 눈치가 빠른 편이어선지 더이상 묻지 않는게 고마웠다. 
잠깐 집에 들러서 짐을 쌓다 한 삼일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짐을 쌓다. 여행은 짐이 가벼워야 가볍게 떠나고 고행을 안한다는 생각에 맞춰서 말이다. 카메라도 챙기고 간단한 여비도 인출했다. 일단은 아무생각 없이 역에 들려서 남쪽으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가장 빠른 호남선 기차가 있었고 광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큰변화 없이 지나가는 창밖에 풍경에 평일 낮 열차는 한산하기만 했고 점점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금방 창밖의 풍경이 질려가기 시작했다. 점심이 공복인지라 열차카폐에서 탄산음료와 달걀을 사와서 먹었다. 통일호가 없어진 이후 무궁화열차는 생각보다 많은 역에서 정차를 하였고 기차는 좀더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특별한 행선지도 급할것도 없는 나로선 크게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었다. 
잠깐 자다가 일어나니 익산에 와있었고 한시간쯤뒤에 금방 광주역에서 내렸다. 이미 해는 졌고 별생각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에 워크샴 들으러 왔을때 갔던 숙소가 생각나서 전남대학교 근처에서 내려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엔 학생들이 많았고 놀랄만큼 저렴한 가격의 맛있는 콩국수를 먹었다. 고소한 맛에 설탕을 평소먹던것보다 조금 많이 넣었다.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쌀쌀한 공기를 마시며 대학의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익숙한 사투리와 뭔가 많이 재밋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걷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고 있는데 눈앞에 우연히 고등학교때 친구를 만났다. 너무 반가워 한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술을 한잔 하기로 하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기분좋게 마시고 그날은 친구의 자취방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곳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친구에게 해장국을 사주고 또 만날 때를 약속했다. 그땐 이곳이 아닌 고향에서 겠지만..
다시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광주 고속버스 터미널은 생각한것보다 너무 커다란 모습이었다. 수십개의 승강장이 있었고 어디로 떠날지 곰곰히 고민하고 있었다. 고향근처로 가서 좀 유명햇던 명승지로 갈까.. 아니면 한번도 안가본쪽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예전에 드라마에서 나왔던 그 섬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무생각없이 완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터미널에서 먹은 햄버거 때문인지 이내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금세 해남쯤을 지나고 있었다. 이내 익숙한 조용한 시골풍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넓은 들과 높은 산들은 없어지고 낮은 구릉들만 눈에 보였다. 완도 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릿한 바다물 냄새가 났다. 낯선 곳이었지만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항구에서 조그마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아저씨가 배표를 팔고 있었다. 청산도의 배표를 사고 조용히 부두에 앉아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낙타의 등갇은 섬들이 줄줄이 구비구비 머물고 있어서 완전한 수평선의 바다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바다를 그 섬들이 품고 있어서 바다가 아니라 조금 큰 호수처럼 보일정도였다. 곧 배가 왔고 한 삼십분정도 배를 타자 금세 청산도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생각보다 섬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택시를 탈지 버스를 탈지 고민해봤지만 그런게 짦은 시간에 있을리가 만무했다. 몇시간동안 기다리기도 뭐해서 운동삼아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풀냄새와 긴햇살이 좋았다. 그리고 여행의 비수기인 봄이라선지 여행객이 거의 없다는것이 더 장점이었다. 아무소리도 느껴지지 않는 조용함.. 머리가 멍해졌다. 
작은 언덕을 넘자마자 아주 조그마한 해변이 보였고 그옆으로 작은 마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조그마한 해변은 폭이 100m를 조금 넘는 크기였고 부두 건너편의 어부들 말고는 아무도 사람들이 없었다. 
해변을 따라 조금 걷다가 문뜩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서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궜다. 파도에 따라 모래가 간지럽게 발가락 사이를 지나갔다. 
수면을 바라다 보니 갑자기 수진이가 생각 났다. 수진이는 내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은걸까? 수진이는 내가 그냥 편한 사람인걸까? 날 사랑해서 나에게 다가온게 아니었을까? 멀리까지 와서 이런 고민해봐야 답도 나오지 않고 여행온게 아깝게 느껴졌다. 
돌계단을 지나 올라오니 들을 가득 매우고 있는 유채꽃 밭이 보였다. 그래 이게 보고 싶어서 여기에 왔었다. 유채꽃의 노란색의 빛들 사이로 돌담이 쌓아져 있었고 그사이에 길이나 있었다. 길을 따라 하얀색의 예쁜집이 있는 곳을 향해서 걸었다. 집은 햐얀 바탕에 초록색 문 긜고 지붕과 창은 노란색이었다. 마치 동화에나 나오는 그런 집같았다. 계속 머리속에 여행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이와의 일들도 모두 잊고 다시 웃으면서 그애를 만날수도 있을것만 같았다. 
햐안 집에 거의 도착했을때 쯤 누군가 유채꽃밭의 돌담에 걸터 앉아 있었다. 조그마한 옆으로 매는 가방, 햐얀색 원피스 베이지색 가디건에 양갈래 머리를 하고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뒷모습 만으로는 나와 같은 여행객.. 일행이 없으면 같이 구경다녀도 괜찮을거 같이 느껴졌다. 한걸음 앞으로 걸어 인사를 하려고 다가섰다. 그쪽에서 먼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 여기 너무 좋다. 그지?"
내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수진이다. 
"너.. 여기 어떻게 온거야.?"
"여행 왔지요. " 라고 하며 어제와 다르게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여기 오는거 알고 있었어? 나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했는데..? 어떻게 된거야? "
"그냥 우연이야. 우연." 라면서 능청스럽게 이야기 하고는 돌담에서 휘 내려왔다. 
"아직 나 구경 하나도 못했는데~ 얼른 가자~" 라는 수진이의 말에 떠밀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방금 돌아온 해변으로 왔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를 따라 왔다갔다 하는 수진이.. 
찬찬히 해변을 이야기 하면서 걷다가 살며시 수진이의 손을 잡았다. 
"오빠. 내가 있잖아. 내가 오빠 처음봤을때,, 그때 기억나?" 조금은 상기된 표정의 수진이가 말했다.
"응. 기억나지."
"실은 그때 오빠가 내가 아는 누구랑 너무 닮아서 정말 너무 닮아서 오빠한테 관심이 있었던거야. 나한테 너무 소중한 사람이거든.. " 
수진이의 말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자꾸 오빠의 모습을 그 사람의 모습에 맞춰봤었어. 마치 내가 알던 그 사람일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봐. "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수진이의 모습에 가슴이 쓰려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던게 아니라 다른사람을 생각하면서 나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많이 해봤어. 오빠랑 같이 있던 기억들도 떠올렸구.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 그리고 확신을 했어. 오빠는 그 사람이 아니란걸. 지금의 오빠를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도 고민 많이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랑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그때서야 겨우 자연스럽게 오빠가 받아들여졌었어. 미안해.. 이제 내가 더 잘할게.." 
"아니야. 넌 지금까지 나한테 잘해 왔었어. 그래도 참 궁금하다. 너가 생각했던.. 그사람.."
"그거 알아? 오빠는 처음에는 모르다가 시간이 갈수록 알면 알수록 재밋는 사람이라거..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는거.. 참 자상하다는거.. " 
수진이의 말을 따라 도로를 걷다가 문득 태양을 바라 보았다. 수진이가 처음에 있었던 곳으로 가서 그 예쁜 하얀집에 숙소를 잡았다. 배는 이미 수진이를 처음 만났을쯤 끊겨 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짐을 다 풀고 씻은 후 편한 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조금은 쌀쌀한 해변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조금씩 더 우리들의 오해들이 풀려가는것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난 그녀에 대해 모르는게 많다. 의문점들도 풀리지 않는다. 계속 비밀을 품고 있는 아이.. 그래도 괜찮았다.  전과는 많이 다르게 편안함을 주고 있으니까.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양치를 하고 가져왔던 짐을 정리했다.  양치하는 수진이에게 수건을 가져다 주었다. 
"오빠는 다 씻었어? "
"으.. 응.. 여기 수건."
"어. 고마워.."
조금은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입을 맞추고 허리쯤을 끌어 안고 들어 올렸다. 내 발등쯤에 그녀의 발이 닿았고 성큼 성큼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와 함께 침대에 살포시 넘어지고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쌓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샴푸냄새가 느껴졌다. 천천히 그녀의 옷의 단추를 조금 풀고 허리쯤의 피부에 손을 올릴때쯤, 화들짝 놀라는걸 느꼈다. 그리고 너무 떨고 있는 수진이.. 무릅위쪽으로 손을대자 순식간에 한뻠뒤로 물러선다. 
"저.. 저기.. 자.. 잠깐만요. "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너무 겁먹었네. 무섭구나. " 
"그런거 아니에요~"
"에이 뭐 맞구만. 나 그냥 옆방에서 잘게. 내일 보자."
멍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수진이에게 이불을 덥어주고는 옆방으로 갔다.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다. 
다음날 수진이와 섬에서 나와서 이곳저곳을 좀더 여행하고는 그날 더 늦지않게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하는동안 수진이와 나는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올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마음의 이면에는 너무 모든게 잘 풀리고 있는것만 갇아서인지 마음한쪽에 알수없는 불안감과 언제까지 이런 행복이 계속 지속될지에 대한 막연함이 가라 앉아 있었다. 




작가의 말 

이번화는 다른화와는 달리 유난히 길게 쓰게 되었네요. 이제 약 3편정도만 더 쓰면 이 소설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이 소설이 소소한 일상의 흐름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늘 그런거 아니구요. 이제 다음화부터 좀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수진이란 인물의 컨셉은. 어떤 사람이라고 딱히 이야기 해주긴 어렵지만 이번화의 이미지는 딱 저런 이미지라고 생각하시면 될거 같네요. 



이 사람은 미야자키 아오이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거라고 생각해요. 사진이 느낌이 정말 괜찮네요. 

 
이번 화의 실제 배경은 청산도가 아니고 보길도 입니다. 제가 보길도는 여행은 해봤거든요. 청산도는 그냥 간단하게 사진정도만 보고 상상 해봤습니다. 청산도에서의 수진이의 모습도 친구랑 보길도 여행에서 만나서 이야기 했던 여자분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저는 막 전역했었고 친구는 아직 군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유쾌한 여행이었던거 같습니다.


실제 배경으로 생각한 하얀 집의 이미지입니다. 드라마 봄의 왈츠에 나왔던 집인데 이런 느낌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회되면 꼭 청산도로 한번 여행가보고 싶네요. 
Posted by blindfish